조증이 의심되는 미국인 T와 까페테리아에서 수다를 벌였다. 정리하다보니 반 정도 쓴 것 같은데 너무 길다.
(전략)
-
소음공해에 관한 포스터가 있다니 재밌다. 미국엔 저런 건 없다.
= 왜인가. 땅이 너무 넓어서인가.
- 아니다. 물론 미국에서도 소음공해는 중요한 이슈지만 포스터로 알리는 일은 본 적이 없다.
= 그만큼 다른 게 더 중요하다는 의미 아닌가.
- 그건 아니다. 시내에서는 차량 소음의 제한치가 있어서 그 선을 넘어가면 법에 저촉된다. 내 친구들도 걸려서 벌금 낸 애들 있다.
= 알겠다. 도발하려는 거 아니었다.
- 사실 여기 애들 장난 아닌 것 같긴 하다. 얼마 전에 콜롬비아랑 축구 경기가 있었는데 남미 애들 완전 소리 지르고 죽음이었다.
=
스포츠란 게 원래 좀 그런 것 아니겠는가.
- 그렇기야 하다. 하지만 유럽이나 남미 애들은 축구에 대한 열광이 남다른 것 같다. 욕설이나 인종주의와 연결되기도 하고.
= 그 왜 미국에서도 야구장에선 원래 욕하는 거라고들 하지 않나.
- 글쎄. 미국에선 스포츠가 '국민의 여가national passtime'라는 개념이라서, 더구나 야구는 대낮부터 느긋하게야구모자 대충 눌러쓰고 반 드러누워서 맥주 한 캔 손에 들고 '어어어' 하면서 즐기는 분위기지, 딱히 욕하고 그러지는 않는다.
= 하긴 야구는 기니까. 미식축구의 경우는 더 열광적이지 않나?
- 실제로 미식축구는 응원도 거세게 하고, 응원가 가사에도 비속어가 섞이기도 한다. 때로는 싸움도 벌어지지만 그건 선수들끼리 그러는 거고. 관중들은 열광하기는 해도 비속해지거나 난폭해지는 것은 아니다.
= 혹시 그건 고등학교, 대학교에서부터 어떤 단결의 수단으로도 활용되기 때문인가? 좀 더 정신적이고 신성한...
- 글쎄. 그런 면도 있긴 할 것 같다. 다만, 스포츠가
(목소리를 낮추며) 종교에 가까운 것은 오히려 남미나 유럽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은 어쨌거나 상당히 개신교적인 나라고, 남미나 유럽은 좀 더 세속적이거나,혹은 가톨릭의 전통이 있지 않나? 종교가 빠진 자리를 축구가 대신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가톨릭적으로 평일엔 막 놀고일요일엔 경건하게 지내면 되는, 그런 개념이 아닐까.
= 확실히 미국이 개신교적, 혹은 청교도적인 면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미국이야말로
살인과 폭력을 즐기는 대상으로 삼을 줄 아는 나라 아닌가.
- 무슨 말인가?
= 뮤지컬 <시카고>가 굉장히 대표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물론 작품 내용은 픽션이지만, 살인을 한 범죄자가 유명세를 타고 스타가 되는 줄거리라든가, 그것을 희화적으로 그리는 모습 같은 걸 보면...
- 어떤 얘기하는지 대충 알 것도 같다. 비디오게임이나 할리우드적인 표현들이겠지.
= 물론 그런 건 작품들이지만, 그 속에 담긴 미국인들의 마인드랄까, 장기랄까. 미국인이 아니라면 만들 수 없는 작품들 같다.
- 사실 에이미쉬 공동체의 농장에서 봉사활동 같은 것을 한 적이 있는데, 가축들이 죽어가는 것이나, 지저분한 것들을 직접 보고 있으면 정말 그런 생각 못 하게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플라스틱 사회에서는 죽음이란 것을 생생하게 느끼기 힘든데, 또한 죽음이 두려운 존재라는 건 변함이 없기 때문에, 죽음은 TV 속에 맡기고 나는 거리를 둠으로써 두려움을 피하고자 하는 게 아닐까 한다.
= 중요한 지적 같다. 그만큼 미국은 역사의 상당히 초기부터 미디어가 존재했고, 이미 현대 사회였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닐까.이를테면 유럽에서는 중세에 흑사병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이나 장애를 희화화하는 고딕 예술이 나오지 않았나. 그게 전통을타고 현재까지 이어진 반면, 미국은 그런 전통이 없이, 초기부터 자동차 타고 다니고, TV와 신문을 보고, 전기를 사용했으니까.
- 미국인에게 그런 경향이 더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다만, 여기서도 CSI 방송하는 거 봐라. 영국에서도 CSI가 킹왕짱이다.
= 한국에서도 다들 CSI 쓰러진다. 확실히, 죽음을 TV에 맡겨두고 싶은 마음은 세계 어디서나 마찬가지 같다. 커피 마실란다. 마시겠나?
- 아니. 괜찮다.
= 홀짝홀짝.
- 나는 미국 사회는
저항의 정신rebel spirit이 전통이라고 생각한다.
= 그런가? 확실히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뒤집어 엎는 애들이 미국에서 자주 나오는 것 같긴 한데, 결국에는 상당히 보수적인 사회라고 생각한다. 마를린 맨슨 같은 애들이 용인되는 걸 보면 신기하지만...
- 어느 세대나 앞 세대의 것들을 부정하고 갈아 엎으려 하는 의식이 강한 나라다.
= 그런데 젊었을 때 막장질하고 다니더라도, 결국에는 어느 나이엔가 양자택일을 하곤 하지 않나?
루저가 될 것인가, 평균이 될 것인가 사이에서.
- 사실 우리들에게 '루저'라는 표현은 굉장히 의미가 격하다. 사회에서 아예 밀려난 존재를 말하니까.
= 그 말 그대로다. 젊었을 때 악마 숭배 이런 거 하던 애들도, 어느 나이가 되고 나면 결국 독실한 기독교, 백인, 중산층으로귀화해서, 저항 정신이라면 가끔 브루스 스프링스틴이나 유투를 듣는 정도로 달래는, 말하자면 여피가 되곤 하지 않나. 그게아니라면 정말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낙오자가 돼버리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
-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진지해질 것을 선택하는 나이라는 개념이겠다. 확실히 그런 면이 없지 않다. 물론 양자가 반드시 대립하는 것만은 아니고, 중간이나 양자적인 삶도 있긴 하지만.
= 그런 게 어떤,
청교도적인 전통이라고 할 수도 있을까?
- 청교도가 미국 사회의 근간이 된 건 맞지만, 사실 모든 공공교육에서는 청교도에 굉장히 부정적인 태도가 있다. 아서 밀러라든지...
=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인들이 아서 밀러를 집어치우지는 않지 않나.
- 물론이다. 하지만 마녀재판 같은 것들은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적 사실이고, 다분히 불편한 과거의 하나가 되었다. 이를테면 우리집도 직계선조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사람들이라 그렇지만, 아서 밀러의 작품들을 읽고 있으면 끔찍하기 그지없다.
= 그러니까, '이제는 이건 아니다'라는 느낌인가?
- 그렇다. '이제는 이건 졸라 아니다'라는 느낌.
= 그럼에도 청교도적인 태도가 '선한 것'이라는 인식은 잠재적으로 갖고 있는 것 아닌가?
- 전통의 근간이 되었으니까.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논다'는... 남미 애들을 보면 주중에도 일하고 놀고 놀면서 일하고,일요일엔 미사 드리며 경건하게 보내고, 다시 월요일에 파티하고 그러지만, 미국에서는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는 정말 열심히 일하고,주말에는 미친 듯이 놀고, 하는 패턴이다.
= 노는 것과 일하는 것을
분리하는 경향 같다.
- 자동차도 '진지한' 차와 노는 차가 따로 있는 사람이 많으니까.
= 나도 미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보면, 고등학생들도 '진지하게 하는 첫 데이트' 뭐 이런 걸로 남자애가 턱시도 입고 꽃 들고 여자애 태우러 오고 하는 장면에 깜놀할 때가 있다.
- 진짜 그런 거 좀 있다.
옷도 미국인들은 정말 아무렇게나 입는다. 일할 때도 편하게at ease 입는 것이 중요하다. 반면에 프랑스 애들은 정말 평소에도 잘 차려입고 다니지 않나.
= 하긴 학교에서 공사하는 아저씨들도...
- 맞다, 유니폼 제대로 차려 입지 않나.
= 심지어 빽바지 입고 벽 뜯는 아저씨도 봤다.
- 미국에선 그런 게 있을 수가 없다. 더우면 티셔츠, 추우면 풀오버 하는 식이지. 여기 오기 전에 프랑스 문화에 대한 강의를 들었었는데, 프랑스에선 모든 것에 조화와 균형을 중시한다고 하더라.
= 수긍도 가고 의심도 가고 한다.
- 나는 그런 거 확실히 느낀다. 여기서
샌들 신은 남자 본 적 있나? 있다면 미국인이다. 반바지도 마찬가지다.
= 맞다, 그러고 보니 정말 못 봤다.
- 나도 샌들 여러 켤레 가져왔는데 한 번도 못 신었다.
= 그럼 너 신발 상당히 많이 갖고 왔구나. 여태 본 게 몇 종류인데...
- 오우.
= 어쨌든, 스니커즈만 해도, 여기 애들 스니커즈는 다 왜 그렇게 딱딱하고 바닥이 얇은지 도저히 못 사겠다.
- 맞다. 스포츠 용도가 아니라 캐주얼로 신는 신발이라도, 확실히 신경을 쓰고 있다. 치즈를 하나 사더라도 싸고 맛있어서 사는게 아니라 수준이 어느 정도 있는 걸 산다. 게다가 거기에 어울리는 와인이며 음식까지 다 맞추는 게 프랑스인이다.
= 요컨대 미국인은 바닥과 꼭대기를 오가고, 프랑스인은 중간을 계속 유지하려 한다는?
- 비슷하다.
돈을 쓰더라도 미국인은 검소하게 아껴서 뭔가를 산다든지 하는 식이지만, 프랑스인은 그때 그때 쓰는 것 같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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